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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연대기 1, 2, 3

다이앤14
2023-10-20
조회수 695

꼬박 이틀동안 잠도 못자고 하루키의 세 권짜리 소설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하루키스러운 모호함. 알쏭달쏭한 수수께끼같은 전개. 짜증날 정도로 환상세계와 현실 또는 과거로 왔다갔다 뒤바뀌는 장면들. 아, 다시 생각해도 머리아프고 욕나온다. 

그래도 끝내 소설을 손에서 놓치 못하게 하는 것은, 교묘하게도 의미심장한 단서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해서 감질나게 하는 그의 능청스러움 때문 아닐지. 

어차피 하루키 소설을 100% 다 이해하고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집어지운지 오래다. 그냥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느낌에 의존해서 스토리를 이어가는 수밖에. 그렇게 읽어가다가 마침내 느껴진 것은, 하루키라는 작가는 ‘평화주의자’로구나 하는 사실. 

당췌 알 수 없는 실체 없는 적과 싸워야하는 처지에서 자신이 파괴될 지언정 마지막까지 희생자를 두고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총칼을 들고 적과 마주서서 싸우겠다는 요란스러움보다 스스로 무너지려는 동지의 손을 끝까지 놓치않겠다는 약속과 의지가 더 대단하고 질기게 보이는 효과랄까.

아웃사이더 같고 자기주장 없어보이는 잔잔한 물결같은 사람인데, 사실은 속안에는 굳은 신념과 자신의 고집이 있어서 자신의 선은 분명히 지켜가는 사람.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하루키도 그런 사람인것 같이 느껴진다. 

소설 속에는 1945년 한창 전쟁의 막바지를 달리며 패색이 짙어지던 일본군의 전쟁 장면들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어떤 장면에서는 일본군이 적군에 의해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며 죽는 경우도 나오지만, 일본인들이 전쟁중에 저지른 잔혹한 행위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기술한다. 

소설은 고양이가 집을 나가고 이상한 전화가 걸려온 이후 아내 구미코가 자취를 감추면서 시작된다. 남편 오카다 도오루가 아내를 찾는 과정에서 만나는 인물들을 통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만행과 과오, 무자비한 역사로 인한 고통 등 폭력의 역사가 촘촘히 그려진다. 여러 역사 혹은 시대가 교차되면서 장면 속 인물간 갈등, 주로 악한 인물들로 인해 희생당하고 트라우마 때문에 혹은 가스라이팅 때문에 조종당하는 희생자들과 이를 도우려는 선한 사람들의 대결구도가 평행우주처럼 반복적으로 이어지며 되물림되는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이전에 자아의 상실과 성숙의 고통을 주로 그려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에서 분수령이 된 소설이다. 잃어버린 아내를 되찾으려는 남자의 분투와 실재했던 폭력의 역사를 교차하여 촘촘하게 짜내려 간 이 소설은 일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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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죽일 수 없을 거라고 했지?” 보리스는 제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카멜 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습니다. “자네 사격 솜씨가 형편없었던 게 아니야. 자네는 그냥 나를 죽일 수 없어. 자네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지. 그래서 기회를 날린 거야. 안됐지만 자네는 나의 저주를 안고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군. 알겠나, 자네는 어디에 있어도 행복할 수 없어. 자네는 앞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도, 사람에게 사랑받는 일도 없을 거야. 그게 나의 저주야. 나는 자네를 죽이지 않아. 하지만 호의로 죽이지 않는 건 아니야.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앞으로도 많이 죽이겠지. 그러나 나는 필요 없는 살인은 하지 않아. 잘 가게, 마미야 중위. 일주일 후에 자네는 이곳을 떠나 나홋카로 가게 될 거야. 봉 부아야주. 두 번 다시 자네를 만나는 일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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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 또렷한 구미코의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당신, 아직은 벽을 통과할 수 있어.”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은지 어떤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장소에 있는 나는 그것을 이겨야 한다. 나에게 이는 전쟁이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아.” 하고 나는 구미코에게 말했다. “당신을 데리고 돌아갈 거야.”


태엽 감는 새 연대기 3 | 무라카미 하루키, 김난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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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