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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집 이층](신경림) 후기 - 평산시애와 함께 읽다

엄지공주
2024-07-20
조회수 227

시를 왜 읽는지, 소설을 왜 읽는지 하는 아이들의 물음에 나의 대답은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대답하고 나면 왠지 당위적인 측면에서밖에 말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느낀다. 이에 알랭드 보통의 말이 필요함을 느낀다.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도덕적 렌즈로 보면 높고 강한 사람은 작아지며, 잊혀져 뒤로 물러나 있던 인물이 오히려 크게 보일 수 있다. 부자이고 품행이 단정하다고 해서 곧바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곧바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소설에서 우리는 표준적인 사회적 위계에 대한 공격 또는 회의, 그리고 경제적 자신이나 혈통보다는 도덕적 가치에 따른 순위 재배치를 발견하게 된다. - [불안], p.170, p.172, 알랭 드 보통, 2011

 

그림 역시 누가 또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세상의 정상적인 이해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샤르댕이나 존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쾨브케의 예술에도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지배적인 물질적 관념에 도전하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세 화가는 여름날 저녁의 하늘, 햇볕에 달구어진 얽은 벽, 환자를 위해 달걀 껍질을 까는 미지의 여자가 우리 눈이 보고 싶어 하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에 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존중하고 갈망하도록 배워온 많은 것의 가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일상생활을 묘사한 위대한 화가들은 제인 오스틴이난 조지 엘리엇처럼 세상에서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념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 [불안], p.179, p.185, 알랭드 보통, 2011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물질을 우선시 하는 풍조에 반기를 든다. 이익만 추구하는 인간들이 놓치고 있는, 보지 못했던 그 무엇, 가치로운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또한 이웃의 누군가의 불행을 그 사람의 잘못이거나 무능으로 치부하지 않고 공감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여기 ‘남이 아닌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 ‘시는 시대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요, 답이다.’, ‘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 ‘시는 무기가 되어 부조리한 시대에 맞서야 한다.’며 시 쓰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계셨던 시인이 있다. 얼마 전(2024. 5. 22.) 별세하신 신경림 시인이다. 대학 때 [가난한 사랑노래]를 읽고 세상의 미약한 존재들의 커다란 외침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주는 시인이라 생각했다. 시대의 아픔에 대응하는 방식에 정면으로 나서서 싸우는 방법뿐 아니라 가난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편이 되어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방법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가르쳐준 시인에게 감사했다. 

이번 평산책방 시모임의 텍스트는 여든 가까이 된 시인이 쓰신 [사진관집 이층]이다. 대학 때 읽었던 시들과는 사뭇 다름을 느꼈다. 세상과 맞서 싸우며 떠돌던 이가 돌아와 자신의 내면으로 회귀한 것 같은.. 또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삶을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집을 읽으면서 평생 시를 쓰다 늙은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알고 싶었다. 시집 [낙타]에 나오는 시인의 말에서 ‘남이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만지기 위해, 생각 속에서 현실 속에서 내달려, 그것을 남들이 가지지 못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내 시의 길’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또 ‘세계의 빠른 흐름 속에서, 방언이 되어버린 시로 인해 오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다’는 믿음으로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다는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시인은 가장 반자본주의적 양식인 시를 통해 느림의 미학을 완성하고 있지 않나. 또 척박한 우리 삶의 대안을 느릿한 걸음을 통해 찾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쪼록 하늘에서는 가난과 고통이 없는 평안을 누리시길 기원한다. 여기에서는 시인의 이러한 삶의 태도를 담은 시들을 소개해 보겠다. 

 

정릉에서 서른 해를/신경림

 

어느새 서른해가 훨씬 넘었다

정릉에 들어와 산 지가

아이들도 여기서 자라 학교 다니고

결혼하고 자리 잡고

은행 옆 주민센터 그 건너 우체국

다시 그 옆 약방에 거리가 없고

길들지 않은 골목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 아침

이 골목 저 거리를 훑고 다닌다

어제까지 못 보던 것 새로 볼 것 같아서

밤이면 깨닫지만

아무것도 새로 본 게 없구나

 

아침이면 다시

활기차게 집을 나온다

입때까지 못 보던 것 무언가

어제 보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게 무언지 오늘

찾아야겠다 생각하면서

정릉에서 서른해를 넘게 살면서

                               - [사진관집 이층], 2014

 

-->1956년 등단한 시인은 10년 동안 절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한다. 그러다 친구의 손에 의해 무작정 상경하여 다시 시를 쓰게 된다. 홍은동 산동네 무허가 주택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아내가 일찍 죽자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와 합가하여 안양에서 살게 된다. 1970년대 중반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중풍에 걸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홀로 남은 어머니와 자식들을 데리고 정릉으로 다시 이사를 한다. 정릉에서 30년 넘게 살았다. 정릉은 팔도 각 고장에서 못살고 쫓겨온 사람들이 몰려 들어온 곳이다. 이곳에서 시인은 계속 두리번거리며 느린 걸음으로 남들이 찾지 못하는 것을 찾아 시를 썼다.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신경림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 [사진관집 이층], 2014

 

--> 패배자, 아웃사이더, 쓰러진 것들의 편이 되어 주었던 시인. 가난하고 작고 약한 것들을 사랑하며 함께 하려 했던 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난 시이다. 중세 계급사회에서 근대 능력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평등이라는 허구를 사람들에게 주입한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평등을 부여한다면서 가난과 패배의 원인을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돌린다. 그러면서 패배자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능력주의 체제에서 가난은 사회적 모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 탓이 되어 버렸다. 노동 착취나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모순적 상황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시인은 가난과 패배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는다. 그 또한 허상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하더라도 삶의 소중한 가치를 알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다. 그 마음으로 시인은 한 편 한 편 시를 써내려갔으리라. 

 

 다시 느티나무가/신경림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 [사진관집 이층], 2014

 

--> 고향집 앞 느티나무를 소재로 삶의 깨달음을 들려주고 있다. 화자는 어린 시절 커 보였던 느티나무가 성장하면서 작아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에 대해 화자는 점점 당당해지기도 하고 거만해지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그때까지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늙고 병들어 다시 찾아오니 느티나무가 다시 커져 있다. 대상을 대하는 태도가 좀 더 겸손해지고 성숙해졌다. 동시에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었음을 슬퍼하지 않고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인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지니 오히려 세상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마음을 비우고 더 적게 바라는 것이 넉넉해지는 길이다. 

 

이쯤에서/신경림

 

이쯤에서 돌아갈까보다

차를 타고 달려온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

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찻집도 기웃대고 술집도 들러야지

낯익은 얼굴들 나를 보고는

다들 외면하겠지

나는 노여워하지 않을 테다

너무 오래 혼자 달려왔으니까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다

내 손에 들린 가방이 텅 비었더라도

그동안 내가 모으고 쌓은 것이

한줌의 모래밖에 안된다고

새삼 알게 되더라도

                                   - [사진관집 이층], 2014

 

--> 이 시는 왠지 시인이 인생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시 같다. 화자는 지금까지 달리던 길을 멈추고 돌아가려 한다. 돌아갈 때는 느리게 걸어서 가려 한다. 빠르게 달려온 인생에서 그동안 무시하고 지나쳤던 것들을 찾으려 한다. 꽃도, 새도, 친구들을 찿아가려고 한다. 그동안 너무 오래 혼자 달려왔다. 아직 부족함이 많더라도 받아들이고 더 욕심부리지 않고 이쯤에서 돌아가려고 한다. 인생의 뒤안길에 서서 시인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고 싶다. 이미 늦었더라도 노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젠 돌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지금껏 이뤄놓은 것이 ‘한줌의 모래’ 밖에 안되는 인생이지만 멈추고 돌아서야 할 때라는 것을 안다. 시인의 부음을 듣고 읽으니 더욱 슬픈 시다. 부디 시인이 마지막 가는 길, 보고 싶고 찾고 싶었던 것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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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