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의 이름으로 발표된 책은 처음 읽어봤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이 너무 재미있어서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천재 작가라는 생각. 미래시대의 이야기까지 다룰 줄이야. 장르도 마구 뛰어넘고, 갖은 감정들이 버무려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또한 출중했다. 짧은 단편임에도 이야기 속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공감하게 되기도 하고 다소 황당하고 난감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속 상황에 냉소적이 되기도 하는.
세상의 끝이라는 페루의 해안에 와서 죽는 새들, 그 새들을 바라보며 고독에 파묻히는 남자와 비싼 보석에 감겨있지만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인 여자. 새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어찌어찌 죽을 자리를 찾아 이곳에 와있는 것을지도 모른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뒤늦게 동성애에 심취해서 평생의 평판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남편과 자신의 가족들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서 홀로 류트를 연주하는 아내. <류트>
군인들에게 몸을 버리고 충격에 시력을 잃게된 소녀를 보살피는 장난감 외판원. 세상은 아름답고 좋은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낙관적인 태도로 살고있는 이들의 등짝을 후려치는 냉혹한 현실. <지상의 주민들>
순수함을 잃은 천박한 무리를 떠나 무사무욕의 마음으로 한적한 섬을 찾은 남자. 그러나 거기서 엄청난 노다지를 발견하고 전 제산을 올인했다가 큰 손해를 보게된다.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그밖에도 흥미진진한 작품들이 너무 많았다. 대부분 인간본성의 표리부동한 면을 드러내거나 선한 마음만으로 견디기에는 혹독한 현실을 고발하는 문제작들이 많았다. 편마다 독특해서 읽는 재미가 있었던. 로맹 가리 책들 하나하나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__________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처녀가 대답했다.
남자가 기운차게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그럼.”
그는 손을 들어 눈송이 하나를 잡았다.
“네가 이걸 볼 수만 있다면” 하고 그는 감탄을 연발했다. “이번엔 진짜 눈이란다! 내일은 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야. 모든 게 하얗고 새롭고 깨끗할 거야. 자, 가자꾸나! 거의 다 왔을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표지판이 나왔다. 남자는 고개를 내밀고, “함부르크, 백이십 킬로미터”라고 씌어진 표지판을 읽었다. 그는 서둘러 안경을 벗었다. 놀라움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벌어진 입은 다물 줄을 몰랐다. 그 서툰 운전사는 그들을 반대 방향으로 육십 킬로미터나 더 멀리 데려다놓았던 것이다. 그는 함부르크로 가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딱한 사내가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가자” 하고 남자는 쾌활하게 말했다. “이제 다 왔단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하얀 밤 속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로맹 가리, 김남주 저










로맹 가리의 이름으로 발표된 책은 처음 읽어봤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이 너무 재미있어서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천재 작가라는 생각. 미래시대의 이야기까지 다룰 줄이야. 장르도 마구 뛰어넘고, 갖은 감정들이 버무려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또한 출중했다. 짧은 단편임에도 이야기 속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공감하게 되기도 하고 다소 황당하고 난감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속 상황에 냉소적이 되기도 하는.
세상의 끝이라는 페루의 해안에 와서 죽는 새들, 그 새들을 바라보며 고독에 파묻히는 남자와 비싼 보석에 감겨있지만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인 여자. 새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어찌어찌 죽을 자리를 찾아 이곳에 와있는 것을지도 모른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뒤늦게 동성애에 심취해서 평생의 평판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남편과 자신의 가족들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서 홀로 류트를 연주하는 아내. <류트>
군인들에게 몸을 버리고 충격에 시력을 잃게된 소녀를 보살피는 장난감 외판원. 세상은 아름답고 좋은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낙관적인 태도로 살고있는 이들의 등짝을 후려치는 냉혹한 현실. <지상의 주민들>
순수함을 잃은 천박한 무리를 떠나 무사무욕의 마음으로 한적한 섬을 찾은 남자. 그러나 거기서 엄청난 노다지를 발견하고 전 제산을 올인했다가 큰 손해를 보게된다.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그밖에도 흥미진진한 작품들이 너무 많았다. 대부분 인간본성의 표리부동한 면을 드러내거나 선한 마음만으로 견디기에는 혹독한 현실을 고발하는 문제작들이 많았다. 편마다 독특해서 읽는 재미가 있었던. 로맹 가리 책들 하나하나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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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처녀가 대답했다.
남자가 기운차게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그럼.”
그는 손을 들어 눈송이 하나를 잡았다.
“네가 이걸 볼 수만 있다면” 하고 그는 감탄을 연발했다. “이번엔 진짜 눈이란다! 내일은 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야. 모든 게 하얗고 새롭고 깨끗할 거야. 자, 가자꾸나! 거의 다 왔을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표지판이 나왔다. 남자는 고개를 내밀고, “함부르크, 백이십 킬로미터”라고 씌어진 표지판을 읽었다. 그는 서둘러 안경을 벗었다. 놀라움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벌어진 입은 다물 줄을 몰랐다. 그 서툰 운전사는 그들을 반대 방향으로 육십 킬로미터나 더 멀리 데려다놓았던 것이다. 그는 함부르크로 가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딱한 사내가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가자” 하고 남자는 쾌활하게 말했다. “이제 다 왔단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하얀 밤 속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로맹 가리, 김남주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