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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이야기>, 박혜진. 심우장 지음, 책과 함께.

'퀸캣' aka 양산퀸캣 찡찡이
2024-03-26
조회수 299

  책모임을 시작한 뒤, '매달, 책방지기 님의 추천서 한 권를 최소 한 권은 읽어보자'는 작고 느린 목표는 달성 중이다. 느려도 벅찬 달성이지만,  미처 읽지 못한 책은 만리장성 만큼 쌓이고 때론 정보들이 교란된다.


  추천서 중 <차이에 관한 생각>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헷갈리다 못해 동일한 책(!)이라는 착각을 한참 했는데, 3월의 책 <구멍가게 이야기>는 나 혼자 <시골상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바꿔서 부르곤 하다가 간신히 제목을 옳게 외운 참이다. 참고로 이 책은, 책방지기 님 추천서 <구멍가게, 오늘도 문을 열었습니다>와는 다른 책이다. 굳이 강조하는 까닭은, 내가 또 중간에 추천서와 혼동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 같은 분이 계실까하여 밑줄 쫙.


  부쩍 암기력 떨어지고 기억력 가물가물해 질때마다 나는 노동시장에서의 내 나이, 내 노동력이 과연 사회 내에서 언제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를 가늠해 본다. 3년?....5년?....오래 버텨서 한 10년? 그 다음엔 어떡하지? 돈은 계속 벌어야 먹고 사는데? 

  

  도시에서 자고 자란 내가 본 나이 들어서도 일하는 여성들을 떠올리자니 청소노동자나 요양보호사 같은 직종이 연상된다. 내가 그럴 일머리가 될까, 능력이 될까를 떠올리면 마음 구석이 답답해진다. 경비원도  아파트 관리소장도 지하철택배원도 여자들은 안 보이던데, 일해야하는 나이 먹은 여자는 어디 가서 무엇을 하는 걸까? 나처럼 행동이 재지 않고 요리 같은 가사에도 재능 없는 여자들은?


  감사하게도 1월 책모임에 편집자 님이 직접 오셔서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 출간 이야기를 풀어주시며 선물로 주셨던 도서출판 책과 함께의 <구멍가게 이야기>. 이번 달의 책이다. 말 그대로 구멍가게의  모든 것을 총망라한 인류학 보고서다. 

  

  저자들은 약 2년 반 동안 전라남도 스물두개 시군에서 백여 곳 구멍가게를 탐방하고 인터뷰를 하며 현장답사했다고 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마을공동체 내 지리적 위치로써의 의미(1부 구멍가게는 어디에 있을까), 구멍가게 시초와 현재에 이르는 역사(2부 구멍가게가 걸어온 길), 가게 내부 공간 구조와 특징, 판매품으로 본 미시사(3부 구멍가게 들여다보기), 구멍가게가 우체업, 금융업 대행 뿐만 아니라 현실적 수익창출 위해 간이주점을 겸하면서 외상, 노름, 주취꾼 횡포를 감내해야하는 상황, 구멍가게 '아주머니'들의 삶 태도(4부 구멍가게에서 찾은 삶의 무늬)까지 다양한 관점들을 담아낸다.

  먹을 것, 달달한 것에 진심인지라 P. 288 3부 8장 [눈깔사탕에서 컵라면까지] 는 아주 흥미진진했고 종이인형, 딱지 같이 이제는 잊혀진 문방구 장난감들을 소개하는 P. 95 1부 3장 [학교 앞 문방구 가게]는 덩달아 추억 여행에 젖어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매달 사모았던 2,200원 하던 월간 소년중앙은 얼마나 설레이던가! 소년중앙이 문방구에 들어오는 21~22일부터 동네 문방구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며 하루에 12번씩 소년중앙은 언제 나오냐고 물어보던 진상 어린이였는데.

 그러나 내게 제일 크게 다가온 것은,  종일 P. 343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놈의 가게를 열어젖히고 있어야하니" 반평생을 구멍가게 안에서 나이 들어간 여성들이었다. 


P. 381 "다시 태어나믄 절대로 안 하지. 아이고 안 해 안 해, 진짜로 나는. 인연인데 나는 진짜로 이런 인연 같으믄 진짜로 안 해."

- <죽마리 구판장> 아주머니.

 

각 장 말미엔 이방인이었을 저자에게 속내 털어놓은 구멍가게 주인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의 사연이 나온다. 정확한 나이는 안 나왔지만 10년 전 60대 중반에서 70대 후반이었을 그 분들은 어쩜 하나 같이 그리 기박한 삶이셨나. 어떻게 하나 같이 평생 홀로 아이 키우고 돈 버신걸까(기혼자나 사별자도 실질적 가장은 구멍가게 아주머니인 건 똑같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성의 삶이 지금보다 척박하다고는 하나,  왜 남편들은 그렇게 몸이 안 좋거나 일찍 돌아가시고 왜 결혼하자마자 시부모님들은 차례대로 편찮으셔서 병수발하시는지.

 

 홀아버지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 자라다가 6.25 때 남편이 행방불명 되어 강제이혼 되고 재혼하는 홀아비한테 가게 내달라고 하셔 구멍가게에 안착한 <연산상회> 할머니(P.55), 신경통에 관절이 안 좋은 총각과 얼굴 한 번 보고 결혼해서 소 키우고 가게하고 남편 뒷치닥거리하며 나이드신 <아곡상회> 아주머니(P. 83), 문방구 앞 학교 수학여행 같이 가실 만큼 고객인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심성의 소유자지만 6.25 전쟁과 가난에 절반 넘는 형제자매를 잃고 서른다섯에 남편도 잃고 악착 같이 일하며 5남매를 키워낸 <모녀상회>  아주머니(P.127), 노름꾼 남편 때문에 새벽엔 논에 나가고 아침이면 가게 열어 24시간 일해야했던 <삼태상회>할머니(P. 422)....


P. 86 "나한테 주어진 삶잉게 살아야 되고, 어쩔 수 없고, 어디 가서 바꿀 수도 없고.

완전히 진돗개가 돼부럿제. 아저씨 봐야지,  가게 봐야지."

- <아곡상회> 아주머니.


P. 131 "밤은 없고 낮만 있으믄 쓰것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는 낮이 혼자 지내는 밤보다 좋다는 과부의 애환과 장사치의 욕심으로 들릴 수 있지만 속뜻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어젯밤에도 저녁 내내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 세시까지 일어나 찌개 끓이고 밥 안치고, 앞마당에 떨어진 감나무 잎사귀까지 쓸어놓았지만 아침은 쉽게 오지 않았단다. 그렇게 부산을 떨어도 누구 하나 그만 하고 자라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 지내는 더딘 밤이 싫어서 낮만 계속되면 좋겠다는 바람인 것이다."

- <모녀상회> 아주머니.


 읽으면서도 가장 안타까웠던 대목은, 구멍가게가 물건이나 술을 사고 파는 장소를 넘어서서 농사와 관련된 정보나 경험이 공유되고 전달되는 마을공동체로써의 장점 이면을 다룬 4부였다. 막걸리 나누며 들리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아는 척 말아야하고, 때로는 주취 폭력과 난동, 외상 떼어먹는 일에도 딱히 대책 없는 '감정노동'을 요구 받는 일. 말 그대로 P. 382 "자고 나서 간을 빼서 못에다 걸어놓고, 긍게 쓸개가 없이 장사를 해라 그 말이여."


대체로 홀몸이시거나 남편이 있어도 큰 도움 안 되고 가장 노릇을 하는 농촌 여성, 그것도 생계를 위해 시작하느라 장사 경험도 없는 여성 입장에서 마을 술꾼을 상대하고 때론 주취폭력을 감당하고 외상이 있어도 받아낼 수 없는 그 일이 얼마나 벅찼을까 싶다. 그래서 4부를 읽는 건 힘들었고 그 서사 안 아주머니, 할머니들의 주름진 손등과 신산한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P. 408 "속씨려 간이 다 녹아불 때가 쌨어라. 징허니 속상할 때 쌨지 참말로. 오장육보가 다 상하고."

-화순 <화림리 구멍가게> 할머니.


P. 410 "이렇게 분노와 자기위안을 반복하면서 외상과의 숱한 싸움 끝에 집약된 한 마디가 '어쩌겠어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꼭 외상에만 해당하지는 않는 듯 하다. 구멍가게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의 삶 자체가 이 '어쩔수 없음'으로 관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구멍가게를 하게 됐고, 어쩔 수 없어서 그만 둘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받아들임, 수용과 '어쩔 수 없다'는 얼마나 같고 얼마나 또 다를까. 생활의 도인 같기도 한 구멍가게 아주머니, 할머니들의 삶.한국 근현대 여성사를 보는 것 같아 마음 아프지만 동시에 그 분들이 일하는 여성으로써 자부심을 가지셨다는 게 좋았다. 구멍가게로 당당하게 자식을 키우고 공부시켰고, 빚을 갚고,  마을공동체로써의 역할을 하면서 말 그대로 사랑방 역할을 하셨다는 것.


 읽으면서 우리의 늘 가고 싶은 구멍가게인 평산책방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전 직장 취직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이 마땅하게 해야했던 선택이셨다면 책방은 과연 무엇이실까? 퇴임 후 조용한 평산마을로 오셨을 때는 책방을 하게 되실 줄 아셨을까? 매일 책방으로 출퇴근 하셔야하는 일이 혹 부담은 아니실까? 

  제발 그렇지는 않기를, 책과 책방 사이에서 함께 하는 시간이 그 분께도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한결 같이 기쁨이기를.


 한 달 후면 개점 1주년이 되는 책방도, 여전히 영업 중인 남도 끝자락의 구멍가게들도 늘 변치 않기를 빈다.

양산군 독자라니까 그냥 반가워서 찍어봄.

9 10
Keat